위대하지만 불행했던 로이 오비슨의 사랑노래 : Roy Orbison in Dreams with Pretty Woman

젠틀한 외모에 커다란 검은 안경을 쓰고 어딘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불러주던 가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였지만 60년대에 영국 투어를 다니며 비틀스를 병풍으로 세워둘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비틀스의 음악적 존경을 받았으며, 록계의 카루소 또는 빅 오 (Big O)라는 별명을 얻었던 가수였습니다.

유난히 불행하였고 일찍 떠나버렸지만 그만큼 위대한 가수. 로이 오비슨 Roy Orbison입니다.

 

로이 오비슨 Roy Orbison in Dreams with Pretty Woman
Roy Orbison (photo by gettyimage)

 

 

I. 로이 오비슨 Roy Orbison의 시작

Roy Orbison

1936년 텍사스주 '버논'에서 자동차 정비공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생일에 아버지가 사준 기타를 처음 접하였고, 여덟 살에 지역 라디오 쇼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Wink Westerners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여 텍사스 주 Kermit에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국인 KERB에서 매주 라디오쇼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역 TV쇼에 출연하고 공연활동을 이어나가다 1956년 밴드 이름을 Teen Kings로 바꾸고 선 레코드와 계약 후 첫 번째 싱글인 Ooby Dooby를 발매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빌보드 핫 100에 59위까지 오르며 20만 장이 팔렸습니다.

음악적으로 잘 맞지 않던 선 레코드와 결별한 후 1960년대 초 모뉴먼트 레코드에서 활동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로이 오비슨은 당시 강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상과 달리 남성의 연약함을 보여준 최초의 남성 로큰롤 가수였습니다. 유독 수줍음이 많았고 무대 공포증도 심했던 터라, 항상 어두운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자신의 약점과 결투를 하듯이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로이 오비슨은 로커빌리 뮤직과 컨트리 앤 웨스턴 가수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지만 1960년 도 Only the Lonely가 빌보드 핫 100에서 2위를 차지하고, 영국과 호주에서는 1위를 차지하면서 메이저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1961년 Running Scared, Crying, 1963년 In Dreams, Mean Woman Blues, 1964년 Oh, Pretty Woman 등이 발표되어 연달아 히트하면서 비틀스와 영국 투어를 진행하는 등 무척 바쁘고 성공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추천글   뮤트 트럼펫(Muted Trumpet)의 이해와 대표곡 소개

그러나 6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이어진 개인적인 비극들로 인해 로이 오비슨의 음악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고 내리막길을 걷게됩니다.

 



II. 불행한 가정사와 죽음

로이오비슨과 첫 부인 클로데트 그리고 아들 로이 주니어 (게티이미지)
로이오 비슨과 첫 부인 클로데트 그리고 아들 로이 주니어 (사진출처 : gettyimage)

1966년 로이 오비슨은 교통사고로 아내 '클라우데트 프레이디'를 잃게됩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화재로 두 아들이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1970년대는 음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시기였습니다.
계속 음반을 발표하였지만 히트곡은 나오지 않았고, 원래 수줍음이 많고 심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렸던 그는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고, 건강도 좋지 않아 하와이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습니다.

 

로이 오비슨이 다시 대중앞에 설 수 있게된 계기는 의외로 후배 가수들이 부른 커버 버전의 히트였습니다.

1980년대 들어 돈 맥린이 Crying을 다시 불러 글로벌 히트를 하였고, 로이 오비슨은 다시 무대로 소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1년에는 영화 로디의 OST 'That Lovin' You Feeling' Again'을 불러 그래미 상을 수상하였고, 1982년에는 반 헬렌이 Pretty Woman을 리메이크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블루벨벳(1986), Less Than Zero (1987)의 OST에 그의 곡이 사용되는 등 직접적인 활동 외에도 지속적으로 노래가 대중에게 노출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을 수 있을만큼 다시 대중의 인기를 얻게된 로이 오비슨은 돌아온 커리어를 만끽하며 왕성한 활동을 해나가게됩니다.

1988년 로이 오비슨은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틴 신을 주연으로 본인의 전기영화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밥 딜런, 조지 해리슨, 제프 린, 톰 페티 등과 함께 'The Traveling Wilburys 트래블링 윌버리스'라는 그야말로 슈퍼 밴드를 결성하게됩니다.
11월에는 빌보드 핫 100에서 9위를 기록한 You Got It이 수록된 그의 새 앨범 Mystery Girl의 녹음이 완료됐고, 트래블링 윌버리스 1집은 큰 성공을 거두는 등 모든 것이 순조롭고 만족스러웠습니다.
간혹 가슴 통증으로 힘들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는 유럽, 보스턴, 앤트워프 등 전 세계를 바쁘게 날아다니며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1988년 12월 6일, 그는 아들들과 모형 비행기를 날리고 어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늦게, 52세의 젊은 로이 오비슨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천글   I Like Chopin - Gazebo : 애달픈 사랑의 노래

 

 

III. 위대한 가수

로이 오비슨은 1956년 첫 번째 싱글 Ooby Dooby 발표부터 1988년까지 23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사후에 3개의 스튜디오 앨범이 추가로 발매되었습니다.

그는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초기 로큰롤 시대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로 평가받으며,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로이 오비슨의 노래 중 22곡이 빌보드 탑 40 차트에 있었고, 2개의 1위 히트곡을 포함해 6곡이 탑 5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에미루 해리스 Emmylou Harris'와 함께 1980년 Best Country Performance Duo or Group상을 수상하였고, 1988년 Best Country Vocal Collaboration상, 1989년 Best Rock Performance by a Duo or Group with Vocal상, 1990년 Best Pop Vocal Performance 남자부문상, 1998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내슈빌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고, 1989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2010년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 2014년 미국 팝뮤직 명예의 전당, 2017년 멤피스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습니다.

 

로이 오비슨은 유전적으로 시력이 나빠 어릴 때부터 두꺼운 교정 렌즈를 사용해야 했으며, 수줍음과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공연을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에 비해 유약한 성격은 작은 일에도 자신감과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중들이 열광할 때 찾아온 불행한 가족사로 긴 슬럼프를 겪었지만 시대는 다시 그를 불러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음악은 80년대 이후 OST에 사용되면서 다시 소개된 곡들이라 하겠습니다.

Roy Orbison – In Dreams

 

Roy Orbison – Crying (Monument Concert 1965)

 

Roy Orbison – Oh, Pretty Woman (from Black & White Night)

 

Roy Orbison – You Got It (Live 1988)

 

※ 함께 들으면 좋은 노래들

추천글   에릭 사티 Erik Satie와 짐노페디 Les Trois Gymnopédies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