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사랑한 목소리, 에디트 피아프와 자크 브렐 (Edith Piaf & Jacques Brel)

시민혁명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에서 대중음악의 큰 축을 이루는 노래 장르인 샹송 (Chanson)은 프랑스 예술적 유산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프랑스 대중음악에 뚜렷한 영향을 남기고, 오랜 시간 프랑스가 사랑하는 목소리로 인정받는 두 명의 남녀 샹송 가수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프랑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불꽃같은 삶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한창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두 사람. 바로 '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와 '자크 브렐 Jacques Brel'입니다.

오늘은 프랑스가 사랑한 두 사람의 삶과 음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가 사랑한 목소리 Edith Piaf・에디트 피아프와 자크 브렐・Jacques Brel

 

I. Edith Piaf・에디트 피아프

 

인생

Edith Piaf・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에디트 피아프

Edith Piaf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12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에디트 지오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으로, 가난한 거리의 공연자인 아버지와 역시 거리의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피아프의 어머니는 에디트 피아프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나가버렸고, 피아프는 친할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합니다.

에디트 피아프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그로 인한 질병으로 힘든 날의 연속이었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파리 거리 여기저기에서 노래하며 유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불안정한 수입으로 간혹 매춘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던 그녀는, 열일곱에 첫아이를 출산하지만 그 아이는 2살이 되던 해 뇌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녀의 개인사는 끊임없는 질병과 고난의 연속으로 유명합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어린 나이에 백내장에 걸려 거의 실명 상태까지 갔었으나 7살이 되어서야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후에도 무려 네 번의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내야 하는 경험도 겪었습니다.
관절염과 불면증으로 인한 약물 복용,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마약성 진통제와 알코올 중독에 빠져 고생한 데다 위궤양 등 끊임없는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963년 10월 10일 체중이 30kg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진 에디트 피아프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데뷔와 전성기

에디트 피아프는 1935년 파리의 나이트클럽 주인인 루이 르플레의 눈에 띄어 음악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루이 르플레는 기본기가 부족하던 그녀에게 무대 공연의 기본을 가르쳤고, 사교계에 그녀를 알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독특한 목소리와 뛰어난 감성은 순식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음반까지 제작하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이듬해 그녀가 알고 지내던 사람에 의해 루이 르플레가 살해되면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루이 르플레 살해의 종범으로 기소되는 등 부정적인 여론을 극복하기 위해 예명을 '에디트 피아프'로 바꾸고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194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까지가 그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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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장 콕토의 단막극에서 공동 주연을 맡았고, 수많은 노래의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전까지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고, 그 후 유럽, 미국, 남미 투어를 하며 이름을 알린 그녀는 이후 에드 설리번 쇼에 8번이나 출연하고, 카네기 홀에서 두 번이나 공연을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게 됩니다.

에디트 피아프의 음악은 그녀의 고단한 인생을 반영했고, 그녀의 노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녀는 1933년부터 1963년 마지막 곡을 녹음할 때까지 300개가 넘는 음반을 발표하였고, 1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습니다.

 

대표곡

1) 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

에디트 피아프의 가장 유명한 곡으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커버한 곡입니다.
이 노래는 1947년에 발표되어 순식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사랑에 빠진 기쁨을 담은 아름다운 사랑 노래입니다.

 

2)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

이 노래는 피아프의 커리어 말기인 1960년에 발매된 곡입니다.
'인생을 최대한 즐기고 후회하지 말자'라는, 에디트 피아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한 적절한 헌사와도 같은 노래입니다.

 

3) Milord (군주)

이 노래는 1959년에 발표되었으며 부유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아프의 독특한 목소리와 감정 전달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4) Hymne à l'amour (사랑의 찬가)

1950년에 발표된 이 곡은 사랑과 상실에 관해 노래한 아름다운 발라드입니다.
이 곡은 사랑에 대한 에디트 피아프 자신의 고뇌를 반영한 것으로, 지금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입니다.

 

5) Sous le ciel de Paris (파리 하늘 아래에서)

1951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파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입니다.
이 노래는 수많은 아티스트가 커버했으며, 피아프가 고향이라고 불렀던 도시, 파리에 대한 헌정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II. 자크 브렐・Jacques Brel

 

자크 브렐 Jacques Brel의 인생

자크 브렐・Jacques Brel
자크 브렐・Jacques Brel

자크 브렐은 1929년 4월 8일 벨기에 샤르벡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보수적이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가톨릭 초등학교를 다니며 지역 보이스카우트에서 활동하는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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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단편 소설, 시와 에세이를 썼고, 15살 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크 브렐은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18살부터 아버지의 공장으로 출근하며 회사 축구팀과 지역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자선 활동을 하며 1950년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지 생활하였습니다.

1952년 곡을 쓰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더니 그해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하게 된 자크 브렐은, 이후 브뤼셀의 카바레에서 공연을 하더니, 1953년 2월 필립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첫 음반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피어난 재능은 한 해 300여 회의 공연을 할 정도로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유럽 음악 시장 전반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68년 마지막 앨범을 발표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는 가수뿐만이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는데 1967년부터는 영화배우와 감독으로 활동하며 두 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자크 브렐은 1973년 처음 폐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수년간 투병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랜 암 투병 기간을 보낸 자크 브렐은 1978년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크 브렐은 위대한 자크(Le Grand Jacques)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현대 샹송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데뷔와 전성기

자크 브렐은 1950년대 후반 브뤼셀과 파리의 카바레와 클럽에서 공연하면서 음악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인 'Jacques Brel et ses Chansons'는 1957년에 발매되었으며 여기에는 Le Diable(Ça Va), Grand Jacques 및 Quand on N'a Que l'Amour와 같은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앨범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그를 프랑스 음악계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 잡게 해 주었습니다.

1960년대 초 자크 브렐은 드라마틱하고 감성적인 목소리 연기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는 Olympia 61, Les Bourgeois, Amsterdam 등 일련의 성공적인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종종 사랑, 죽음, 사회적 논평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깊은 감성이 담긴 목소리와 강력한 무대에서의 존재감으로 그는 열성적인 팬층을 확보하였습니다.

1968년, 자크 브렐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Jacques Brel is Alive and Well and Living in Paris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쇼는 그의 노래를 영어로 번역하여 진행되었으며 1,000회 이상의 무대에 오르는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Mon Oncle Benjamin과 Le Far West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두 번째 연출 영화의 실패 이후 1974년대 은퇴를 선언하고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마르케사스 제도로 이주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고 있었고, 1977년 그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와 그의 마지막 앨범인 Les Marquises를 녹음했습니다.
앨범에는 Vieillir, Jaures, Le Bon Dieu와 같은 노래가 포함되어 있으며 자크 브렐의 요청으로 홍보 캠페인은 크게 진행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으로만 100만 명 이상의 팬들이 사전 주문을 하는 등 여전한 인기를 확인하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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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브렐이 프랑스어권의 음악과 문화에 미친 영향은 상당합니다.
그의 노래는 전 세계 100명 이상의 아티스트에 의해 커버되었고, 9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불렸습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시적인 가사, 짙은 호소력의 파워풀한 목소리, 역동적인 무대 매너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자크 브렐은 1954년부터 1977년까지 모두 14개의 스튜디오 앨범과 2개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였고, 10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2편의 영화를 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편의 연극과 영화에 작가로 참여하였습니다.

 

대표곡

1) Ne me quitte pas (날 떠나지 마세요)

자크 브렐의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커버한 곡입니다.
1959년에 발매된 곡으로 연인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브렐의 독특한 목소리와 작곡 능력이 돋보이는 파워풀하고 감성적인 곡입니다.

 

2) Amsterdam (암스테르담)

이 곡은 1964년에 발매된 곡으로 암스테르담에 바치는 헌정곡입니다.
1964년 I'Olympia 공연 현장의 관객들 앞에서 즉석으로 만들어내 세상을 놀라게 한 곡입니다.

 

3) Quand on n'a que l'amour (가진 것이라곤 사랑뿐일 때)

자크 브렐의 첫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찬가로서 자크 브렐의 로맨틱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4) La chanson des vieux amants (오래된 연인들의 노래)

이 노래는 1967년에 발표된 곡으로,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5) Le Moribond (르 모리봉)

1961년에 발표된 이 곡은 죽어가는 한 남자의 마지막 소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곡은 어렵고 감정적인 주제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자크 브렐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가슴 아픈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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