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근현대기는 서로 다른 체제와 종교와 이념이 부딪히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수백 년을 내려온 관념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에 우리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문수학한 친우들도 신념의 차이로 반목할 수밖에 없었고, 피를 나눈 형제도 마찬가지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별한 형제들'은 식민과 분단, 전쟁과 냉전으로 전개된 20세기 한국의 근대사를 헤쳐온 13쌍의 형제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서로를 부정해야만 했던 형제들, 살아남은 자와 사라진 자, 대대로 호의호식하는 매국의 피붙이들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I. 책의 정보
- 제목 : 특별한 형제들
- 부제 :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을 넘나드는 근현대 형제 열전
- 저자 : 정종현
- 출판 : 휴머니스트, 2021년 12월 6일 초판 발행
- 분량 : 319쪽 (참고문헌 포함)
II. 저자 정종현

저자 정종현 교수는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세기 한국학의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였고, 2010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포스트 닥터 연수 후 현재는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동경제국대학의 조선 유학생 연구, 다산의 초상과 남북한의 실학 전유, 4・3과 제주도 로컬리티, 뒤늦게 도착한 '68 혁명' 등 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저서로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독서사', '다산의 초상', 분단시대의 앎의 체제', '국내 사회운동과 여성 독립운동가' 등이 있습니다.
특히 2019년에 발표한 '제국대학의 조센징'은 일본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1,000여 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을 추적한 역작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때 조선인 유학생들의 유학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확장하여 작업한 것이 바로 이 책 '특별한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III. 특별한 형제들의 간략한 소개
1. 식민과 분단으로 서로를 지운 ‘평양’의 형제: 정두현과 정광현

정두현(1888~?)은 일제강점기 조선과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한 교수, 의사, 정치인입니다. 도쿄 제국대학 농과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지내다가 3·1 운동에 참여하면서 구금되어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이후 평양청년회를 조직하고 청년 운동을 하다가 40세의 나이로 도호쿠 제국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다 1945년 10월 평양의학전문학교장으로 초빙되면서 김일성 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는 등 북조선 최고의 인텔리로 활약하였습니다.

정광현(1902~1980)은 정두현 형제의 셋째입니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3·1 운동에 가담하여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없게 되어 일본 유학을 떠나 동경제국대 영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습니다.
계몽운동가였다가 나중에 친일인사로 변절하는 윤치호의 사위이며, 1950년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임명된 후 1967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친족-상속법 관련하여 많은 업적을 발표하였습니다.
2.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이인과 이철

이인(1896~1979)은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제헌의회 국회의원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변호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상대로 무료변론을 하여 김병로, 허헌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친일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던 인물로서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 활동을 무력화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수사를 지휘하며 좌익 소탕을 주도한 검찰총장으로, 남로당과는 구원舊怨을 가지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이철(1917~1950)은 경성제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인텔리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경도되어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조선좌익서적출판협의회의 기획부원으로서 조직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협회 내에서 좌익 서적의 중복출판을 조정하고 번역을 주도하였습니다. 1950년 형 이인의 집에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후 형 이인이 손을 써 남로당 탈당 성명만 하면 풀려날 상황에서도 거부하여 수감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수감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시 인민위원회에서 일하였고, 유엔군의 서울 탈환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월북하다가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공산당 부역자와 애국가 작곡가: 안익조와 안익태
안익조(1903~1950)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의 형입니다.
안익조 형제는 모두 7형제로 안익조가 둘째, 안익태가 세 살 터울의 바로 아랫 동생입니다.
안익조는 학창 시절 유명한 야구선수였으며, 도쿄제국대 수의학과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폐결핵 전문의 자격을 가진 의학사였습니다. 하지만 의대를 졸업하고 처음 가진 직업은 컬럼비아레코드사의 경성지점 문예부장이었고 조선에 처음으로 스타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입한 연예사업가였습니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군위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다 1949년 육군 헌병 소령으로 특별 임관 후 대구에 주둔하던 제3사단 헌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살벌한 레드 퍼지가 진행되던 상황에서 귀순자 신분보장과 무고한 사람을 공산당으로 모략하는 자를 엄벌한다는 방침 등으로 인해 좌익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방어부대 제7사단 헌병대장(중령)으로 근무할 때 '서울 시내에서 국군으로부터 이탈된 낙오자로서, 7월 3일경 괴뢰군 군사 비밀조사위원회의 자진 출두 자수하여 은닉하였던 국군의 무기를 자진 제공하고 거주지를 괴뢰군에게 사무실로 제공하고 국군의 전투 상황 및 부대 집결 상황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총살당했습니다.

안익태(1906~1965)는 일본에서 사립 중학교와 고등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스물다섯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1938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교향악단 객원지휘자로 유럽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40년을 전후한 유럽 활동 시기에 안익태의 활동 대부분은 히틀러의 독일 제국과 일본 제국간의 우호와 협력을 증진하는 음악 프로그램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과 독일의 친선을 위해 설립된 일독회(日獨會)와 독일 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그의 후원자였고, 안익태 자신도 나치와 일본 인사들에게 협력하고 연주회를 적극 제안하며 자신을 지휘자로 써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안익태의 회고와 공식적인 전기에는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유럽에서 친일·친나치 활동을 하던 시기와의 시간의 간격만큼이나 인간 안익태의 신념의 변화도 큰 것 같습니다.
4. ‘서유견문’의 후예들: 유만겸과 유억겸

유만겸(1889~1944)은 구당 유길준의 장남으로 유길준이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연금 생활을 하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연구생활을 하다가 1918년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조선총독부 고등관으로 일하면서 관료생활을 하다가 1939년 충북지사가 되었습니다.
1940년 창씨를 거부하고 이에 관한 신문기사가 게재되면서 지사직을 그만두었지만 그후로도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협력하였습니다.

유억겸(1896~1947)은 유만겸보다 일곱 살이 어린 동생입니다. 중학교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을 연구하였습니다.
1923년 귀국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이후 사회 경력의 대부분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와 행정가로 보낸 교육자입니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그룹과 행동을 같이 한 유억겸은 1938년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독립을 도모한 활동 전반을 후회하고 천황을 위해 살겠다는 전향성명서를 요구받고 수일 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제출하였고, 이후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5. 근대 한국의 인플루언서: 김성수와 김연수

김성수(1891~1955)는 '자기 땅만 밟고서도 전라도 전역을 다닐 수 있다'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고, 1919년 경성방직과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경영하였습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고 그후 1946년 고려대학교로 개편하여 성장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1년부터 1년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일제 후기의 친일행적으로 지탄받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김연수(1896~1979)는 김성수와는 다섯 살 터울이 나는 친동생으로 김성수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와세다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김성수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김성수가 경영하던 경성방직 등에서 근무하고 경영까지 맡게 됩니다.
1924년 삼수사를 설립하고 나중에 삼양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이후 삼양그룹으로 성장한 이 회사의 초대회장입니다.
일제 말기 중추원 참의 및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등의 친일 경력으로 인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분류되는데 김연수 본인은 일대기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한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다'라는 자기반성의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6. 어느 식민지 조선귀족 형제의 삶: 민태곤과 민태윤
민태곤(1917~1944)은 대한제국에서 외부, 탁지부, 법부, 농사공부대신을 지닌 남작 민종묵의 증손자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만 17세에 남작 작위를 이어받고 도호쿠제국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던 중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접하고 민족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1941년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습니다. 이때 1년 5개월여 동안 경찰과 검찰의 혹독한 취조와 수형 생활로 망가진 폐로 인해 고통받다가 1944년 11월 22일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민태곤은 조선 귀족 158명 중 해방 이후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민태곤의 동생 민태윤(1924~ )은 일곱 살 많은 형이 항일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가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죽고 난 후, 가족이라고는 홀어머니만 남은, 재산도 권세도 없는 이름뿐인 영락한 귀족이었습니다. 1945년 1월 징집되어 허난성에서 7개월간 주둔하며 미군의 공습에 시달리다, 8월 초에 조선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았습니다.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직장을 전전하다가 한국전쟁을 겪게 되고, 인민의용군 징집을 당하지만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 수복 후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하자 철도국에 취직을 하였고 아주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7.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 형제: 김사국과 김사민

이 책에서 저자는 김사국 金思國(1892~1926)과 김사민 金思民(1898~?)은 나라와 민중을 위한 실천적 삶으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뜻 이상으로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김사국은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에서 일하며 고학을 하였습니다. 귀국 후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고등교육을 이수하였습니다.
1919년 2월 다시 귀국한 이후로 1926년 폐병이 악화되어 서른다섯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김사국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한 삶을 살았습니다.

김사민은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지칭하는 '서울파'의 영수였던 형 김사국과 함께 조선노동대회 및 자유노동조합과 서울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며 서울파 수뇌부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형이 투옥된 이후로도 조선노동대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는데 1922년 '신생활사 필화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수감 당시 구치소에서도 일본인 간수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저항을 하였으나 그로 인한 고문으로 심신이 망가진 후 1924년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김사민과 그의 어머니인 안국당은 그 후 구걸로 연명을 하였다는 신문 기사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8. ‘아카’에서 ‘빨갱이’로, 혁명가 남매의 비극: 김형선·김명시·김형윤

김형선(1904~1950), 김명시(1907~1949) 그리고 김형윤(생몰 미상) 삼 남매는 경남 마산포의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맏이 김형선은 점원과 부두 노동자, 마산 창고회사 서기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관련을 맺었고, 더불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마산공산당을 조직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 검거를 피해 상하이로 피신을 했다가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국내 거점 마련을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여동생 김명시와 함께 노동자 조직을 만들며 선전전을 하던 중 발각되어 해외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여동생은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김명시는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으로 최전선에서 전투와 선전전을 벌여 조선의 잔 다르크라 추앙받게 되는 여장부입니다.
남동생 김형윤이 마산에서 적색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체포되고 얼마 후 김형선도 붙잡히면서 세 남매가 모두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 남매는 끝까지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수난의 삶을 살았고 그 최후도 비극적이었습니다.
9. 혁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혁명가 형제: 오기만·오기영·오기옥

오기만(1905~1937), 오기영(1909~?), 오기옥(1919~1950?) 삼 형제는 황해도 배천군의 잡화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의 아버지 오세형은 3·1 만세 시위의 주모자 중의 한 명이었으며 이로 인해 해주 감옥으로 이송되며 집안의 고난과 투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오기만은 만세 거사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수형생활을 한 후 중국으로 망명을 하였고 거기서 공산당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다 체포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회생 불가능한 몸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풀려난 오기만은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 오기영은 열한 살의 나이에 만세 시위를 벌였고 혹독한 고문을 맛본 조숙한 소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책을 읽으며 배움을 이어갔으며 열여덟의 나이에 동아일보 배천지국의 수습사원이 되었고, 나중에 기자로 입사를 하게 됩니다.
민완기자로 활약하다가 1937년 동아일보에서 해고된 후에도 친일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분단 후 1949년 월북하였습니다.
10. 악인전, 매국적과 창귀: 선우순과 선우갑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선우순(1891~1933), 선우갑(1893~?) 형제는 평양 출신으로 친일파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선우순은 1910년 일본인이 창간한 평양신문에서 일하면서 친일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3·1 운동 직후부터 '직업적 친일분자'가 되어 전국을 돌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강연을 하고, 중추원의 지방 유력자 모임 등에서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강연을 하였습니다. 또한 대표적 친일단체인 대동동지회를 창립하였고, 내선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선우순의 두 살 터울 동생인 선우갑(1893~?)은 중국, 일본, 미국 등지를 종횡한 이동형 밀정이었다고 합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밀정 공작을 하다 잡힌 적도 있고, 재미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탐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11. 오빠들이 떠난 자리: 임택재와 임순득

임택재(1912~1939)와 임순득(1916~?) 남매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제법 부유한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는 모두 2남 3녀였는데 임택재가 2남, 임순득이 막내였습니다.
임택재는 학업성적도 괜찮은 문학소년이었는데 일본 야마구치 고등학교 입학 후 반일운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반일활동으로 고등학교를 제적당하고 귀국한 뒤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34년 3월 검거되었고 1935년 석방을 보름 앞두고 전향을 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수감 생활에서의 고문과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1939년 스물여덟에 폐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임순득은 고창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이화여고보에 입학한 후 학생동맹휴학 사건의 주모자가 되는 등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동덕여고보로 편입하게 됩니다.
여성 사회주의자로서 독서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또다시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이후 임순득은 기자생활을 하다가 작가로 문학작품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2. 디아스포라 청년 시인의 죽음과 부활: 심연수와 심호수

북간도의 시인 심연수(1918~1945)는 강릉 태생으로 1940년 스물세 살의 늦은 나이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니혼대학 전문부 예술과에서 유학을 하였습니다.
1943년 만주로 돌아와 교사로 일하다가 아내와 부모 형제가 있는 룽징으로 돌아오던 중 만주국 왕청현 춘양진 기차역 근처에서 무장 군경과의 시비 끝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동생인 심 호수(1925~)는 심연수보다 일곱 살 아래의 동생으로 심연수의 황망한 죽음 이후 심연수가 남긴 원고와 자료를 수습하여 반세기 넘게 지켜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연변 조선인 사회에서 심연수의 유고는 위험한 물건이었지만 심호수는 목숨을 걸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꽁꽁 숨겼다고 합니다.
2000년 심연수의 유고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집 심련수 문학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13. 혈연을 넘어선 이상의 형제들: 모스크바 8진 형제

마지막 장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의 영화학교를 지망하여 유학생으로 선발된 여덟 명의 망명객들의 이야기입니다.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망명을 신청한 8인은 1958년 북한대사관의 요청으로 집단 퇴학을 당하고 기숙사에서 쫓겨났습니다.
모스크바 인근 도시 모니노의 숲에서 천막을 치고 지내던 그들은 한 달가량 은근 집단농장의 일을 거들어 야채를 얻거나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이후 1958년 8월 4일, 소련 정보는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무국적 임시 거주증'을 발급하였습니다.
소련 정부는 정치적 회합을 통한 집단행동을 할 수 없도록 그들을 소련 전역으로 한 명씩 갈라놓았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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