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으로 살펴본 조선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의 대표적인 폭정으로 알려져있는 분서갱유는 비단 옛 중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조선시대에 있었던 분서갱유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분서갱유를 묘사한 18세기 작자미상의 그림 (출처 중앙일보)
분서갱유를 묘사한 18세기 작자미상의 그림 (출처 : 중앙일보)

 

I. 분서갱유・焚書坑儒

분서갱유는 말 그대로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음'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의 시황제가 기원전 213년과 기원전 212년에 일으킨 별개의 두 사건을 묶어 말하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당시 난립하였던 전국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논쟁으로인해 발생 가능한, 통일 제국의 사상적 분열을 막고, 왕권의 강화와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분서'를 시행했다고 합니다.

의약, 농경 등 실용서, 복서(점치는 책)류 등을 제외한 제자백가들의 책들과 진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모든 역사서들을 금서로 지정해서 긁어모아 태워버리고, 제국의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법가(法家)사상에 기반을 둔 강력한 통일정책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노선에 비판을 하는 유학자들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황제가 분서를 하여 공부를 하지 않아 불노불사를 설파하던 신선사상의 방사들에게 속았다고 시황제를 비난하는 전국의 학자들 460명을 잡아들여, 대중을 미혹시킨다는 핑계로 생매장시킨 것을 '갱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분서갱유란 언론을 차단하고, 정치적 비판 집단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II. 조선시대의 분서갱유 (焚書坑儒)

이러한 분서갱유는 중국 왕조뿐만이 아니라 근대의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제후국들과 황제와의 갈등이 역사의 중심인 중국과 달리 왕권과 신권의 경쟁과 갈등의 역사인 조선시대에 분서갱유와 같은 정치적 행위가 빈번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분서갱유의 기록을 찾아 정리하였습니다.

 

1. 태종

  •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12월 15일(병신) 1번째 기사
  • 서운관에 간직한 참서를 불살랐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

​태조는 민간의 음양사상이 조선의 유교사상과 맞지 않다 하여 궁에 있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워버리고, 백성들 중에 한 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전부 목매달아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게다가 관아에 신고하면 포상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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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간 음양사상 기록물에 대한 탄압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2. 세조

  •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 기사
  •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 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드디어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고조선 비사와 같은 고대 역사기록물을 시중에 유통시키지 않은 행위에 대한 일부 학자들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무리하게 왕권을 장악한 세조가 명나라의 직첩을 받기 위해 명의 눈치를 보면서 중화사상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할 소지가 있는 책을 긁어모은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반대의 설로

'세조는 신비스럽게 쓰여진 상고사 자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모으기는 했으나 분서를 하지는 않았으며, 세조가 이 책들을 모은 이유는 왕권 찬탈의 명분으로 삼았던 부국강병을 부각하고,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정당화시키기 어려운 자신의 집권과정을 옹호하기 위함이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3. 예종

  • 예종실록 7권, 예종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3번째 기사
  •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였다.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 필(匹)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예종은 세조와 달리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하기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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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종

성종실록 1권, 즉위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2월 9일(무오) 6번째 기사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 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 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 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여기서 예종과 성종은 조선왕조 묘호를 보면 아시겠지만 세조에 이어지는 두 명의 왕입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세조를 이어 왕에 오른 인물인데 집권 14개월 만에 20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왕입니다.

성종은 세조의 큰아들의 아들로서 세조의 장손자가 되겠습니다. 예종이 요절하자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7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 20살에 친정을 한 왕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근접성에 유추해볼 때 예종과 성종은 세조의 의지를 그대로 이어 책을 긁어모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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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분서를 하였다는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세조/예종/성종은 분서를 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그들이 긁어모았다는 우리 상고사의 역사서적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한 권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정말 분서를 해버린 것인지,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도굴꾼들이 팔아먹은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조선시대에 갱유와 같은 행위는 다양한 형태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시대 500년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화, 정난, 환국들이 왕의 의지인지 붕당정치로 인한 신하들의 정권다툼인지 명확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상가/학자/정치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III. 반복되는 역사

1980년 언론통폐합
1980년 언론통폐합

분서와 갱유의 역사는 왕조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독재국가에서는 분서갱유와 유사하게 또는 다른 형태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그러했고, 홍콩 언론탄압이 그러했고, 박정희의 보도지침이 그러했고, 전두환의 언론통폐합이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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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인간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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