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백지에 뾰족하게 갈아놓은 새 연필이 아니라, 널찍한 화면 위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컴퓨터 자판 위에 손은 얹어야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당장 저도 그런 편입니다. 기획안이든 안부 편지글이든, 키보드 위에 얹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이란 게 참 좋습니다.
하지만 손글씨 쓰기의 매력이란 것이 꽤나 중독성이 강합니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잠깐만 뒤적여봐도 각종 문구의 리뷰, 글쓰기 방법 안내, 필체 소개, 필사의 장점 등 손글씨의 매력을 항변하는 콘텐츠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손글씨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I. 손글씨 ∙ 필적 ∙ 뇌의 흔적?
'글씨에는 '뇌의 흔적'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본진 작가가 쓴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라는 책의 프롤로그 제목입니다.
작가는 이 책의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적어놓았습니다.
글씨는 손이나 팔이 아닌 뇌로 쓴다.
글씨를 '뇌의 흔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렇게 때문에 글씨체는 바로 그 사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구본진 작가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필적학자로서 유명인, 사건 사고와 관련된 인물의 글씨체 분석, 그리고 정부기관으로부터 필체 분석을 의뢰받는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2017년 10월에는 국방부의 요청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글씨 분석 의견서를 작성하였고, 2018년 6월 트럼프와 김정은의 역사적 회담 때는 <로이터 통신>으로부터 김정은의 필체 분석을 의뢰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필체 분석 작업이 진행되는 이유는 의뢰인이 작성자의 필체 속에서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성향과 성격, 그리고 글을 쓰는 당시의 감정 상태와 작성 문서에 대한 생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필체의 분석은 문서 작성자의 일치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필적감정만이 아니라 작성자의 생각을 엿보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인 것입니다.
어릴 적 필체에 관하여 흔히 듣기도 하고 쓰기도 하던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악필이다 그러나 악필은 모두 천재가 아니다.' 뭐 이런 말 말입니다.
자신의 조악한 필체를 감싸기 위한 변명으로 하던 말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혹시 나도 천재가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안고 하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스스로 '아~ 나는 천재가 아니고 그냥 악필이구나'라는 진실을 깨달으면서 '자기 합리화'로 만족하는 때를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서예가 자기 수양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보면 글씨를 쓰면서 내면을 다스리는 것은 검증된 자기 계발 수단인 것 같습니다.
II. 글쓰기와 자기 수양

글씨와 사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주장은 공자, 주자, 이황, 송시열과 같은 동양문화권 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아인슈타인, 구스타프 융, 셰익스피어, 괴테, 발자크,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 등 고대 그리스부터 근세 서양의 석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글씨 연습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바꾸는 방법은 동양에서는 3,000년 동안 효과가 입증된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프랑스 등에서 20세기 초반부터 글씨를 통해 심리를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 적용하여 그 효과가 확인되었습니다.
희망하는 인간상을 상정하고, 거기에 맞는 글씨체를 설정하고 연습한다면 인간은 글씨 연습이라는 간단하지만 지루하고, 더디지만 효과가 검증된 방법을 통해 충분히 스스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바꾸는 방법 중에서 글씨 연습만 한 것은 없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쉬우며, 정밀하고, 효과적이다.
그러면 희망하는 인간상에 맞는 글씨체를 찾는 것이 가장 선결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씨체는 어떤 것인지, 여러 가지 글씨체들이 가진 저마다의 특징을 찾아내고 정리하여 내게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한 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연습이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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