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붕당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붕당(朋黨)의 정의와 그 등장 배경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I. 붕당이란 ?
붕당을 한자로 쓰면 '벗 붕朋', '무리 당黨'을 사용합니다.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면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붕당은 사이좋은 친구들끼리 뭉친 친목 모임이라기보다는 학문적・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비슷한 사람들이 뭉쳐 상대편과 정책 대결을 하며 정치 활성화에 기여했던 집단으로 지금의 정당과 매우 유사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II. 붕당의 등장 배경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 역사에는 '붕당'이라고 할만한 정치 집단이 없었습니다.
귀족세력이나 호족, 무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집단을 형성하여 활동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그것도 정치가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조선 중기에 붕당과 붕당 정치가 등장하게 됩니다.
1. 사림의 중앙 정치 등장
조선 중기에 붕당이 나타난 가장 큰 배경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을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향촌에서 성리학 연구에 치중하며 생활하던 재야 학자들이 성종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을 '사림'이라고 불렀는데, 이들 사림들은 자신이 배우고 연구한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중앙 관료로 근무하면서 성리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학자적 시각으로 국가 정책이나 관직, 학문을 논하고 왕과 논리를 기반으로 대결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 대결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학문적 관점에 따라 자연스럽게 붕당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2. 왕권의 약화
붕당의 등장에 두 번째 이유로 개국 초기에 비해 왕권이 약화되었고 국왕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것을 배경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태종이나 세조와 같이 왕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나, 세종처럼 관료들과 세력 균형을 이루며 안정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시기에는 붕당이 형성되기 어려웠습니다. 왕의 권력에 대항하거나 살아남기 바쁜 입장일 테니까요.
하지만 성종 이후부터는 국왕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 했던 연산군은 신하들에 의해 쫓겨났으며, 중종은 자신을 추대한 신하들 눈치를 보기 급급하였습니다.
인종과 명종 역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만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정의 중심축은 국왕으로부터 관료에게로 이동하였고, 관료들에 의한 붕당 정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III. 붕당의 시작
1. 사림의 등장
붕당 정치의 시작은 중종이 즉위했을 무렵이라고 합니다.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하에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들을 '조광조 일파' 또는 '기묘명현'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조광조를 축으로 하는 사림 세력이 붕당과 같은 특정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등장한 붕당이 본격적인 정치 세력으로 형성된 것은 선조 대입니다.
정통성이 부족한 왕인 선조가 즉위할 즈음인 16세기 후반, 사화로 쫓겨났던 사람들이 속속 중앙 정계로 복귀하면서 정치의 주도권은 완전히 사림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시기부터 사림들은 외척 정치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를 두고 견해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이가 든 기성의 사림들은 외척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반면, 새로이 등장한 신진 사림세력들은 외척을 철저하게 배척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붕당이 출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직접적인 계기는 이조 전랑이라는 관직의 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붕당의 시작
이조 전랑은 문관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의 정 5품 정랑과 정 6품 좌랑을 합쳐 부른 관직이름입니다.
고위 관직은 아니지만, 중하위 문신 관료의 자리 이동을 주관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의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다른 직책과 달리 이조 전랑만큼은 임금도 임명에 관여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의 여론인 '공론'을 반영해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형태로 인사가 진행되었습니다.
1572년 새 이조 전랑을 선임할 당시 공론은 신진 사림 김효원이 적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성 사림 심의겸이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김효원이 외척 윤원형과 친했다며 이조 전랑에 추천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조 전랑에 오르지 못한 김효원은 이후 더욱 모범적으로 일하였고 2년 뒤에는 이조 전랑 자리에 올라 전랑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조금 구설이 있던 김효원이 절치부심하여 입신양명하게 되는 나름 괜찮은 이야기 진행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김효원이 전랑직을 마치자 후임 전랑의 선임 문제가 공론에 올랐습니다.
당시 공론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적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김효원은 심충겸 대신 다른 사람을 후임 전랑으로 선임한 것입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감정싸움이 깊어졌고 여기에 여러 사림들이 끼어들며 분파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심의겸의 집이 정궁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을 '서인 西人'이라 하였고,
김효원의 집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동인 東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붕당은 여러 사건과 의견 대립을 거치며 분열을 거듭해 크게 '남인 南人', '북인北人', '노론老論', '소론少論' 등으로 나뉘게 됩니다.
여기서 남인과 북인은 동인에서,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각각 갈라진 붕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IV. 조선 붕당의 흐름
최초 선조 때 형성된 동인과 서인은 광해군, 인조, 효종과 현종 그리고 숙종 등을 거치며 분파를 거듭하게 됩니다.
이는 정치적 득실과 개인적 감정도 분명히 있었을 터이지만, 명분은 당연히 개별 사안과 정치적 결정에 관한 성리학적 해석과 입장의 차이였습니다.
아래 선조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붕당의 흐름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인과 서인, 그리고 거기서 갈라진 남인, 북인, 소론 그리고 노론의 간단한 특징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명칭 | 특징 | 명칭 | 특징 |
| 동인 東人 |
동대문 쪽에 살던 김효원 신진 사림 세력 강경파 |
북인 北人 |
서인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 광해군 폐위로 몰락 |
| 남인 南人 |
서인에 대해 온건한 입장 장희빈 사사로 몰락 |
||
| 서인 西人 |
서대문 쪽에 살던 심의겸 훈구파와 친하던 온건파 |
소론 少論 |
남인에 대해 온건한 입장 경종 지지 영조 즉위로 몰락 |
| 노론 老論 |
남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 영조 지지 이인좌의 난 평정 이후 확고한 우위에 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