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시대 붕당의 기원에서 처음 등장하는 두 명칭. 훈구와 사림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정확한 의미와 기원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4대 사화에 대해 최대한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 정리해 보았습니다.

I. 관학파 ・ 官學派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혁명파 사대부와 그들의 이념을 계승한 후예들은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보다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와 문물을 갖추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들은 숭유배불주의를 내세워 유학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특히 세종과 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균관 같은 교육 시설에서 학문을 닦은 신진사대부들을 '관학파 官學派'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단종에서 세조로 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관학파 내부에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II. 훈구파 ・ 勳舊派
관학파 안에서도 사육신과 같이 세조의 왕위 계승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판세력이 있었는가 하면, 세조의 반정에 참여하여 권력을 잡고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세력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국을 주도했던 세력과 그들의 맥을 이어간 후예들은 나중에 등장하는 사림 세력과 비교하여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운 관료 세력이라는 뜻에서 '공 훈勳'에 '옛 구舊'자를 써서 '훈구파'라고 하였습니다.
관학파의 맥을 이어온 집단으로 관학파를 훈구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훈구파의 주요 인물로는 국가창업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 하륜, 권근 등과 그의 제자들, 정인지, 최항, 신숙주, 양성지, 서거정 등이 있습니다.
조선 창건의 과정에서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역성혁명에 참가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게 되는데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아래의 사학파와 사림파의 시초가 됩니다.
III. 사학파 ・ 私學派
한편, 고려 말기 정권 교체기 때, 새 왕조 개창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의리를 다한 길재 같은 학자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개창 이후 향초에서 살며 사적 인맥을 통해 자손들에게 학문을 전수했기에 '사학파'라 불렀습니다.
사학파의 주요 인맥은 길재로부터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광조로 이어지며 전승되었습니다.
이들은 정지지도의 이념으로서 성리학을 연구하던 훈구파와 달리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IV. 사림파
사학파의 후예들은 관학파 주도의 조선 정치에 비판적이어서 현실 정치에는 발을 담그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국가 기틀이 안정되는 조선 중기에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에 의해 김종직이 발탁되면서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김종직을 따르는 제자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사학파의 후예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으며, 이들을 향촌에서 은둔하던 학자들이라는 뜻에서 '선비 사士', '수풀 림林'자를 써서 '사림파'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훈구 세력의 비리와 부정을 비판하며 점차 정치 세력을 넓혀 나가며 훈구파의 반대편에서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훈구파의 견제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는데 이게 바로 사림의 화, 사화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라는 4대 사화가 있습니다.
훈구와 사림의 극심한 대립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자, '사림의 화'라는 이름처럼 사림의 엄청난 피해로 귀결되는 사화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결과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무오사화 ∙ 戊午士禍 ∙ 1498, 연산군 4년
연산군 초기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조선은 원래 왕이 죽으면 다음 왕 즉위 후에 실록청이라는 임시 관청을 만들어 선왕의 역사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책인 '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이것들이 모여 '조선왕조실록'이 되는 것인데,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관이 평소에 왕의 행적들을 기록해 놓은 사초를 모으는 과정에서 실록 편찬 담당자인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실록 안에 넣으려 하였습니다.
이 글은 중국 초나라 왕 의제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은연중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호시탐탐 사림의 활동을 주시하고 있던 훈구 세력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고, 결국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일손이 거열형을 당하는 것을 비롯해 사람 세력 다수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오사화로 인해 모두 6명이 처형되었고, 모두 51명이 처벌되었습니다.
2. 갑자사화 ∙ 甲子士禍 ∙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는 친어머니인 폐비 윤 씨의 원수를 갚고자 한 데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는 성종의 왕비였다가 쫓겨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자기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왕이 되고 난 후에, 그것도 재위 10년이 지난 후에야 친어머니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격분한 연산군은 사건을 조사해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된 인물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일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훈구 세력도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사림의 피해가 극심하였습니다.
폐비 윤 씨의 폐출에 동의한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라는 어명과 함께 그들을 모두 사사시켰는데,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 폐비의 동의한 윤필상 등을 사사하였고, 이미 사망한 사람인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를 하는 등 그야말로 피의 숙청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갑자사화로 인해 122명이 목숨을 잃는 등 모두 239명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3. 기묘사화 ∙ 己卯士禍 ∙ 1519년, 중종 14년
갑자사화 이후 신하들은 폭군이 되어 버린 연산군을 쫓아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킵니다.
새롭게 옹립된 중종은 자기를 왕위에 올려 준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반정 공신들이 정치를 이끌어 나갔고 사림파도 다시 정국에 참여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던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들을 대거 발탁하였고 이들은 주로 언관으로 진출해 연산군 시기에 훼손되었던 유교 정치의 이상을 되살리려 하였습니다.
연산군이 중단시켰던 경연을 부활시키고 도교 행사를 주관하는 소격서를 폐하고, 향약을 실시하고, 유교의 기본 교리를 담고 있는 '소학'을 보급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이상적인 군주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해 논술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현량과'도 실시하였습니다.
한편 신진 사림들은 중종반정 당시 공신으로 책봉된 이들 중 다수가 실제 공에 비해 국가로부터 너무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재조사를 통해 공신에서 삭제하는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중종과 공신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됩니다. 공신들은 자신들의 위신과 이익에 손해를 입힌 사림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사림은 '위훈삭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왕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힘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왕의 체면을 훼손하게 되면서 중종의 반감도 받게 됩니다.
결국 중종은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는 조광조 일파를 '붕당을 결성하고 후학을 이끌어 격렬한 발언을 했다'는 명분으로 죽이거나 쫓아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사림들은 다시 큰 피해를 입으며 위축되었고, 그들이 추진하던 개혁 정책 역시 중단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의 이물이 극형을 당하였고 나머지 사림들도 대부분 귀양에 처해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고, 김안국∙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조정의 중신들도 피해를 받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4. 을사사화 ∙ 乙巳士禍 ∙ 1545년,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는 중종 말기에 훗날 인종으로 즉위하는 왕세자의 외삼촌 윤임을 우두머리로 한 '대윤 세력'과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대군(훗날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 세력'간의 왕위 계승 문제에서 비롯된 사화입니다.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대윤 세력의 세상이 된 것처럼 보였으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윤원형 일파는 윤임 일파가 인종의 후계자로 명종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삼으려 했다며 윤임 일파를 탄핵해 제거했습니다. 이 사건은 왕실 외척인 파평 윤 씨 내부 싸움이었지만, 사림들이 대윤파와 소윤파에 모두 가담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림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훈구파가 사림파를 핍박했다'라는 일반적인 사화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는 사건으로, 옥사를 주도한 정순봉은 원래 기묘사화의 피해자 측인 조광조 일파의 선비였고, 남곤, 심정, 김안로가 그랬듯 대다수 권신은 사림출신들이 많았습니다.
[+1] 정미사화 ∙ 丁未士禍 ∙ 1547년, 명종 2년
을미사화가 4대 사화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앞서의 3대 사화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의 사화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로 넘어가나 했던 을미사화는 바로 다음 해, 명종 2년인 1547년 1월, 이임, 나식∙나숙 형제, 권벌 등 윤원로를 탄핵했던 사람들을 사사하거나 유배 보내고 2월에는 이중열, 성자택, 김저 등이 윤임과 한패라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을미사화가 계속 이어지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더불어 그해 9월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홍윤 옥사 사건등이 터지며 무려 6년간 '소윤의 잔혹시대'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명종 2년에 을미사화의 피해가 이어지면서 지속되는 것을 정미사화라고 합니다.